[제1편] 호주와 홍콩을 거쳐 위니펙으로: 나의 역마살과 캐나다 이민의 시작

사주에서 말하는 ‘역마살’이 26살 이후부터 본격적으로 나타난 것 같습니다.

브리즈번에서 에머랄드까지 — 호주 워킹홀리데이 (2008)

2008년, 26살의 나이에 무작정 호주행 비행기를 탔습니다. 처음 정착한 곳은 브리즈번. 피자·파스타 식당에서 dish washer로 일을 시작했습니다. 설거지를 하면서도 영어가 들리지 않았고, 주방은 좁았고, 하루가 길었습니다.

몇 달 후, 더 많은 돈을 벌 수 있다는 말에 퀸즐랜드 내륙의 소도시 에머랄드(Emerald)로 이동했습니다. 거기서 맥도날드에 취업했는데 — 그 선택이 인생을 바꿀 줄은 몰랐습니다. 함께 근무하던 직원 중에 홍콩에서 온 여성이 있었고, 그 사람이 지금의 아내가 됐습니다. 호주에서 약 1년을 보냈고, 그 1년이 남긴 건 영어 실력보다 더 중요한 것이었습니다.

홍콩에서의 2년 — 두 번의 직장과 하나의 결심 (2017~2019)

아내가 홍콩 사람이다 보니, 자연스럽게 홍콩에서 함께 살게 됐습니다. 2017년 3월에 홍콩에 입성했습니다. 처음엔 화장품 도매 업체에서 Inventory Manager로 일했습니다. 나쁘지 않은 직장이었지만, 생활비가 비싼 홍콩에서 더 많은 돈이 필요하다는 걸 느꼈습니다. 그래서 이직을 결심했고, 홍콩 공항 활주로 연장 프로젝트(Three Runway Extension)의 파일링 업체에서 Site Engineer로 근무하게 됐습니다. 대규모 인프라 프로젝트였고, 근무시간이 길었지만, 그만큼 물질적으로 도움이 되었습니다.

홍콩 생활은 겉으로는 나쁘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2019년 들어 분위기가 달라졌습니다.

홍콩 시위가 본격화되면서, 길거리에서 경찰의 진압 장면을 직접 목격하는 일이 생겼습니다. 중국에 매수된 경찰이 시위대를 무력으로 탄압하고, 미디어 노출을 막고, 홍콩 시민들의 목소리를 억누르는 모습이 일상이 됐습니다. 아내도 심리적으로 많이 힘들어했습니다. 홍콩 사람들이 느끼는 자유 박탈의 공포가 집 안으로 들어왔습니다.

저를 결정적으로 움직인 건 아이였습니다. 당시 갓 태어난 아이가 자라면서 공산주의적 사고방식에 무감각해지는 모습을 상상하니 — 그것만큼은 받아들일 수 없었습니다. 홍콩 정부는 점점 중국 체제를 따라갔고, 제3국으로의 이민을 진지하게 검토하기 시작한 게 2019년 6~7월쯤이었습니다. 아직 40대 전이었고, 기회가 남아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호주도, 영국도 아닌 캐나다를 택한 이유

처음엔 호주, 영국, 캐나다 세 곳을 놓고 비교했습니다.

호주는 이미 경험이 있어서 낯설지 않았지만, 최근 들어 중국 자본과 인구 유입이 급격히 늘었고, 이민 정책도 계속 변하고 있어서 장기적으로 불안했습니다. 영국은 파운드 환율 자체가 생활비 장벽이었고, 인종차별 문제도 상대적으로 심각하다는 이야기를 주변에서 많이 들었습니다.

캐나다를 선택한 결정적인 이유는 두 가지였습니다. 첫째, 아내 쪽 친척이 캐나다에 살고 있어서 현지 생활에 대한 실질적인 정보를 얻을 수 있었습니다. “이민자로서 기회가 있느냐”는 질문에 돌아온 답이 긍정적이었습니다. 둘째, Manitoba PNP(MPNP)라는 현실적인 경로가 있었습니다. 1년 공부 후 관련 직종에 취업하면 바로 영주권 신청이 가능한 구조였습니다. “학업 → 취업 → 영주권”이라는 로드맵이 명확했고, 그게 다른 주보다 훨씬 현실적으로 느껴졌습니다.

2019년 8월 31일, 위니펙 입성

위니펙에 처음 발을 내딛은 날은 2019년 8월 31일이었습니다.

첫 인상은 솔직히 이랬습니다. “아… 여기가 캐나다구나.” 뭔가 대단한 감흥을 기대했는데, 딱히 그런 건 없었습니다. 발전되지 않은 한국의 소도시 같은 느낌? 오히려 호주 에머랄드와 비슷한 분위기였습니다. 홍콩의 초고밀도 도시생활에 익숙했던 눈엔 위니펙이 조용하다 못해 한산하게 느껴졌습니다.

학교는 The University of Winnipeg의 Project Management 과정이었습니다. 영어 공인점수가 없었기 때문에, 학교 자체 어학 과정(English Pathway)을 3개월 수료하면 본과에 진학할 수 있는 프로그램으로 등록했습니다. 숙소는 학교 기숙사로 입학 허가와 동시에 신청했기 때문에, 낯선 도시에서 방을 구하는 어려움은 없었습니다.

가장 힘든 건 외로움이 아니었습니다. 부담감이었습니다. 그리고 아이가 2살이었습니다. 멀리서 화상통화 화면으로 보는 아이의 얼굴이 날이 갈수록 달라지는 걸 느낄 때 — 그 감정은 설명하기 어렵습니다.

코로나 — 계획에 없던 변수

본과에 진학하고 얼마 지나지 않아 코로나19가 터졌습니다. 학교 주변 자영업자들부터 문을 닫기 시작했고, 곧 학교도 봉쇄됐습니다. 모든 수업이 온라인으로 전환됐습니다.

잃은 것이 두 가지였습니다. 인맥과 영어 실력.

캐나다 현지인들과 교류하며 인맥을 쌓겠다는 계획은 온라인 수업으로 전환되면서 사실상 불가능해졌습니다. 더 아쉬웠던 건 영어였습니다. 듣기와 말하기는 직접 대화하고 상호작용(interact)해야 느는 건데, 화면 앞에서는 그게 되지 않았습니다. 읽고 쓰는 건 늘었지만, 말로 빠르게 주고받는 능력은 제자리걸음이었습니다.

그럼에도 2년의 시간이 완전한 낭비는 아니었습니다. 외로운 기숙사 방에서 캐나다 건설업과 PM에 대한 공부를 깊이 할 수 있었고, 위니펙의 영하 30~40도 겨울을 혼자 버티면서 나름의 단단함이 생겼습니다. 처음엔 낯설었던 텅 빈 겨울 거리도, 어느 순간부터는 그냥 일상이 됐습니다.


이민을 준비하는 분들께 한 가지 드리고 싶은 말이 있습니다. 완벽한 조건을 갖추고 떠나는 사람은 없습니다. 저도 그랬습니다. 부족한 영어, 낯선 나라, 2살짜리 아이를 두고 혼자 떠난 선택. 하지만 한 발짝씩 내딛다 보면 어느새 익숙해지는 날이 옵니다.

다음 편 보기: [제2편] 기회와 도전: 위니펙에서의 첫 직장과 캐나다 건설업 입문

공식 출처 및 참고 자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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